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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볼셰비키 혁명과 러시아 임시정부의 몰락

by moneyping 2025. 5. 31.

1917년 러시아에서는 제정 붕괴 이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지만, 볼셰비키가 주도한 10월 혁명으로 무너졌다. 이 글에서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과 러시아 임시정부의 몰락에 대해 작성하겠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과 러시아 임시정부의 몰락
1917년 볼셰비키 혁명과 러시아 임시정부의 몰락

2월 혁명 이후의 임시정부, 왜 실패했는가

1917년 3월(구력 2월), 러시아 제정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과 내부 모순으로 인해 붕괴했고, 로마노프 왕조는 퇴위, 수백 년간 지속된 전제 군주제가 종말을 맞았다. 제정이 무너지자 입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러시아 임시정부(케렌스키 내각)’를 구성하였다. 이 정부는 표면적으로 자유, 의회주의, 법치를 지향했지만, 곧 여러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첫째, 전쟁 지속 여부에 대한 입장 차가 가장 큰 갈등 요소였다. 임시정부는 연합국과의 외교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이었지만, 피폐한 대중들은 즉각적인 전쟁 중단과 평화를 원했다. 특히 농민과 노동자들은 전선에 동원되기를 거부하며, 생활고에 시달리던 상황이었다.

둘째, 토지 문제 해결 실패 역시 대중의 지지를 잃게 만든 요인이었다. 수백 년간 지속된 대지주의 토지 독점 체제에 대한 개혁은 임시정부가 미루거나 모호하게 처리했으며, 이는 농민 계층의 극심한 불만을 초래했다.

셋째, 이중 권력 구조가 임시정부의 정치적 기반을 약화시켰다.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임시정부와 함께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노동자·병사 평의회)가 동시에 기능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임시정부보다 더 급진적이고 대중 친화적인 노선을 지향했다. 소비에트는 점차 노동자·병사 대중을 포섭해 사실상의 대중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결국 임시정부는 명분은 있었으나 실질적인 통치력과 대중 지지를 상실한 상태였고, 이러한 권력의 공백을 이용해 볼셰비키가 세력 확장을 꾀하게 된다.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 10월 혁명과 쿠데타의 전개

볼셰비키(다수파라는 뜻)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내 급진파로, 레닌을 중심으로 전위당 이론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주장해 왔다. 1917년 4월, 레닌은 ‘4월 테제’를 발표하며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외쳤고, 이는 대중의 요구와 맞물려 빠르게 확산되었다.

1917년 여름, 케렌스키 내각은 군사 쿠데타 위협(콘일로프 사건)을 겪으며 정치적 기반이 급격히 약화되었고, 이 틈을 타 볼셰비키는 소비에트를 장악하고 군사조직을 재편하기 시작한다. 특히 트로츠키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무장 봉기의 준비를 지휘하였다.

10월 25일(신력 11월 7일), 볼셰비키는 쿠데타 형식으로 임시정부를 전복시킨다. 이는 피의 혁명이라기보다는 정교하고 기민한 무장 봉기였다. 주요 관공서, 전신국, 교통시설을 신속하게 점거한 볼셰비키는 겨울궁전을 공격하여 케렌스키 정부를 무너뜨리고, 페트로그라드를 장악한다.

이 과정에서 임시정부는 거의 저항하지 못했다. 케렌스키는 도주했고, 정부 구성원들은 체포되었다. 같은 날 밤, 볼셰비키는 제2차 전국 소비에트 대회를 통해 소비에트 정부(소비에트 정권) 수립을 선언했다. 레닌은 인민위원회의 수반으로 추대되며,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이로써 수백 년 제정 체제의 붕괴 이후 잠시 등장했던 입헌주의적 임시정부는 단 8개월 만에 종말을 고하고, 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 정부가 등장하게 된다.

혁명 이후의 구조 변화와 세계사적 영향

볼셰비키의 정권 장악 이후, 러시아 사회는 극단적인 체제 전환을 맞게 된다. 소비에트 정부는 즉각적으로 다음과 같은 조치를 단행한다:

‘평화에 관한 포고령’ 발표 →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1918): 독일과 단독 평화 협정

-토지 국유화 선언 → 대지주 토지 몰수 후 농민 분배

-공장 노동자 통제 확대 → 공산주의 경제 초석 마련

-반대파 탄압 및 언론 통제 강화 → 적백내전 발발

이러한 급진적 조치들은 러시아 내부에서 큰 저항을 불러왔고, 결국 1918년~1922년까지 적백내전이 벌어진다. 하지만 볼셰비키는 군사적, 정치적으로 이를 극복하고, 이후 소련(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공식 출범(1922)시킨다.

국제적으로도 볼셰비키 혁명은 세계사적 대전환을 의미한다. 19세기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지배하던 국제 질서 속에서, 러시아는 최초로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국가를 수립하며, 이후 중국, 쿠바, 베트남 등 공산주의 혁명의 선례가 된다.
또한 이 사건은 미국 중심의 자유주의 진영과 소련 중심의 사회주의 진영이라는 냉전 구도의 출발점이 되었고, 20세기 전체를 관통하는 이데올로기 대결의 서막을 알리는 전환점이었다.

한편 볼셰비키 쿠데타는 정통성 논란도 계속되어 왔다. 일부 역사가는 이를 ‘인민의 혁명’이라 보았지만, 다른 일부는 “소수 급진세력의 무장정변”으로 규정하며, 진정한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무산시킨 사건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볼셰비키 쿠데타와 임시정부 붕괴의 역사적 의미

1917년 볼셰비키의 무장봉기는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체제와 사상의 완전한 전환이었다. 입헌주의와 자유주의, 의회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려 했던 임시정부는 대중의 불만과 정치력 부족으로 실패했고, 이를 기민하게 파고든 볼셰비키는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이 사건은 20세기 정치사의 분기점으로서, 이념적 이분법, 냉전 구도, 공산주의 체제의 형성과 확산이라는 일련의 흐름을 촉발시켰다.
또한 이는 권력 공백기에서 대중의 열망이 어떻게 급진적 세력에게로 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정치적 교훈이기도 하다.

볼셰비키의 10월 혁명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민주주의의 취약성과 대중 동원의 위험성, 이데올로기의 힘을 되짚게 만드는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참고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05445&cid=62107&categoryId=62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