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공산당을 장악한 뒤 독재 권력을 구축하며, 동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개인숭배 체제를 완성했다. 이 글에서는 차우셰스쿠 정권의 탄생과 붕괴 직전까지의 통치 전략에 대해 작성하겠다.

공산당 권력 장악과 권위주의 체제 구축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1965년 루마니아 공산당 제1서기로 집권하면서 사실상 루마니아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는 집권 초기에 어느 정도의 자주적 외교 정책을 추구하면서 서방의 일시적인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고, 이를 기반으로 내정을 안정시킨 후 본격적인 권위주의 통치 체제를 구축했다.
차우셰스쿠는 먼저 루마니아 공산당의 조직을 완전히 장악하고, 당을 중심으로 한 1인 지배 체계를 확립했다. 공산당은 모든 국가 기관과 사회 조직 위에 군림하였고, 차우셰스쿠는 당 내에서 모든 주요 결정을 단독으로 주도했다. 이러한 권력 집중은 그가 1974년 국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며 법적으로도 정당화되었다. 이후 차우셰스쿠는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영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초법적 권력자로 군림했다.
그는 권력 장악 후 비판세력 숙청과 언론 통제, 검열 강화를 통해 정치적 반대 의견을 원천 봉쇄했다. 비밀경찰 세큐리타테는 루마니아 국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체제 비판자에 대한 감금, 고문, 실종 등이 자행되었다. 또한 체제 비판은 곧 반역죄로 간주되어, 지식인과 예술가들도 검열의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러한 전체주의적 통치 구조는 차우셰스쿠가 루마니아를 자신의 사유 국가처럼 운영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으며, 권력의 절대성을 강화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다.
개인숭배의 강화와 정치권력의 신격화
차우셰스쿠 체제의 또 다른 핵심은 극단적인 개인숭배 문화였다. 그는 소련이나 동유럽 여타 국가들과는 차별화된 차우셰스쿠 신화를 만들어냈고, 체제 홍보를 통해 자신을 민족의 구세주로 포장하였다.
정부는 언론, 교육, 문학, 미술 등 모든 매체를 통해 차우셰스쿠 부부를 찬양하는 콘텐츠를 생산했다. 심지어 그의 아내 엘레나 차우셰스쿠도 ‘과학자’이자 ‘국모’로 신격화되며, 실질적인 공동 통치자로 군림했다. 초등학생들은 학교에서 차우셰스쿠에 대한 충성 맹세를 암송했고, 매일 아침 방송에서는 그의 어록이 낭독되었다. 거리와 광장에는 차우셰스쿠의 동상이 세워졌고, 국영 방송은 그의 하루 일정을 실시간 보도하며 지도자의 무오류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개인숭배는 루마니아 사회 전반에 공포와 무기력을 확산시켰다. 모든 권력은 차우셰스쿠에게 집중되었고, 당 간부들조차 그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로 인해 국가는 합리적 정책 결정 기능을 상실하였고, 지도자의 직관과 충성 경쟁이 국정 운영의 기준이 되었다.
또한, 차우셰스쿠는 역사 왜곡을 통해 자신을 루마니아 민족주의의 계승자로 포장했다. 그는 고대 다키아인의 후손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루마니아 민족의 우월성과 순수성을 주장했다. 이는 주변 국가와의 긴장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고, 내부적으로는 소수 민족 억압과 문화 탄압의 정당화로 이어졌다.
경제 통제, 대규모 건설, 그리고 몰락의 씨앗
차우셰스쿠는 정치적 안정 이후 경제 부흥을 위한 대대적인 산업화와 도시 건설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그는 ‘자력갱생’ 노선을 내세우며 외채 상환과 무역 흑자를 목표로 삼았고, 이 과정에서 무리한 산업화가 단행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수도 부쿠레슈티에 건설된 국민의 집으로, 이는 세계에서 가장 큰 행정 건물 중 하나로 꼽히지만, 루마니아 국민의 세금과 피로 세워진 상징적인 구조물이었다.
경제 통제는 철저했다. 가격, 생산량, 소비 수준까지 모두 중앙 정부가 계획했고, 농업 집단화 정책은 시골 주민들을 도시로 강제 이주시켜 도시 중심 산업화에 투입시켰다. 식량과 연료는 철저히 배급제로 운영되었으며, 대외 무역을 통해 벌어들인 외화를 국가가 독점했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정책은 심각한 국민 생활 수준의 저하를 초래했다. 전기와 난방이 제한되고, 마트의 진열대는 비어 있었으며, 의료·교육 인프라는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 차우셰스쿠는 1980년대 초반까지 루마니아의 모든 외채를 상환했지만, 그 대가로 국민은 극심한 빈곤과 결핍을 견뎌야 했다.
과도한 건설 프로젝트와 외채 상환 집착은 국가 경제를 압박했고, 차우셰스쿠의 경제 정책은 결국 대중의 분노를 야기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시민들은 체제의 비합리성에 대한 불만을 키워갔고, 이는 1989년 티미쇼아라 시위를 기점으로 전국적 반정부 운동으로 확대되어, 차우셰스쿠 체제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억압과 통제 위에 세워진 체제의 종말
차우셰스쿠 체제의 완성은 강력한 통제와 개인숭배, 철저한 국가주의를 통해 이루어졌지만, 이는 국민의 자발성과 창의성, 권리를 철저히 억압한 결과였다. 그의 통치는 정치적 폐쇄성과 경제적 고립, 사회적 피로감을 불러왔고, 결과적으로 루마니아를 고립된 전체주의 국가로 전락시켰다.
1989년 혁명은 단지 정권 교체가 아니라, 권력 독점과 억압적 통치의 구조적 한계를 드러낸 역사적 사건이었다. 차우셰스쿠 체제의 완성은 곧 그 몰락의 시작이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의 통치를 통해 권력 집중의 위험성과 자유 없는 발전의 허상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참고 : By unknown - Fototeca online a comunismului românesc, Photo no. #E594,, Attributio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5886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