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15세기에 잉글랜드 왕국의 왕권을 둘러싸고 랭커스터 왕가와 요크 왕가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1455년 5월 22일에 벌어진 제1차 세인트올번스 전투부터 본격화되어 1485년 8월 22일에 벌어진 보즈워스 전투까지 30여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1487년 6월 16일에 벌어진 스토우크필드 전투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랭커스터 왕가와 요크 왕가가 각각 붉은 장미와 흰 장미를 가문의 상징으로 사용했으므로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장미 전쟁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장미전쟁은 잉글랜드 왕국의 왕권을 놓고 벌어진 내전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장미전쟁이 일어난 배경과 원인
랭커스터 왕가와 요크 왕가는 모두 플랜태저넷 왕가의 방계 혈족이다. 랭커스터 왕가는 플랜태저넷 왕가의 제7대 잉글랜드 국왕인 에드워드 3세의 셋째아들인 초대 랭커스터 공작 존의 후손이고 요크 왕가는 존의 동생인 초대 요크 공작 에드먼드의 후손이다.
랭커스터 왕가는 1399년 초대 랭커스터 공작 존의 아들인 헨리 4세가 사촌인 리처드 2세를 퇴위시키고 왕위에 오르면서 잉글랜드 왕국의 왕권을 장악했다. 당시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백년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헨리 4세의 아들인 헨리 5세 때에 이르러 아쟁쿠르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며 프랑스에 우위를 확립했다. 헨리 5세는 1420년 트루아 조약으로 프랑스 왕 샤를 6세의 딸인 카트린 드 발루아와 결혼하며 프랑스의 왕위계승권과 섭정의 지위를 인정받아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공동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하지만 1422년 헨리 5세가 갑작스럽게 죽고 태어난 지 1년도 되지 않은 헨리 6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상황은 급변하였다. 헨리 5세의 동생들인 베드퍼드 공작 존과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가 섭정으로서 각각 프랑스와 잉글랜드를 나누어 통치했으나 권력을 둘러싼 귀족들 간의 경쟁으로 랭커스터 왕가의 지배력은 약화되었다. 프랑스에서도 샤를 6세의 아들인 샤를 7세가 반격에 나서면서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고 1429년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오를레앙 포위전이 실패로 끝난 뒤로는 전황이 점차 잉글랜드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헨리 6세가 1445년 휴전을 위해 프랑스 왕비의 조카인 마거릿과 결혼하면서 귀족들 간의 갈등은 더욱 커졌다. 헨리 6세의 측근인 서머싯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는 마거릿 왕비와 함께 프랑스와의 화의론을 주도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가 노르망디와 아키텐 등 프랑스 내의 영토를 잇달아 잃으면서 잉글랜드의 군 사령관이던 요크 공작 리처드를 중심으로 한 귀족들의 반발이 매우 커졌다.
전쟁의 발발과 전개 과정
이처럼 귀족들의 갈등이 커진 상황에서 1453년 8월 헨리 6세는 심각한 신경쇠약 증세를 보였다. 그러자 추밀원의 귀족들은 대회의를 소집해서 서머싯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를 런던탑에 가두고 요크 공작 리처드를 섭정으로 삼았다. 하지만 1455년 1월 헨리 6세가 복귀하면서 요크 공작 리처드는 섭정의 지위를 잃고 서머싯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가 다시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자 요크 공작 리처드는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5월 22일 제1차 세인트올번스 전투에서 서머싯 공작을 죽이고 승리해 다시 섭정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두 세력의 갈등은 계속되어 1459년부터 다시 군사적 충돌이 시작되었다. 요크 파는 1460년 7월 10일에 벌어진 노샘프턴 전투에서 승리하고 헨리 6세를 붙잡았다. 헨리 6세는 자신의 왕위를 유지하기 위해 아들인 에드워드 왕자를 대신해 요크 공작 리처드를 왕위계승권자로 삼는 데 합의했다. 하지만 마거릿 왕비는 이러한 합의를 인정하지 않고 스코틀랜드의 지원을 받아 반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30일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요크 공작 리처드를 죽이고 승리를 거두었다. 이듬해 2월 마거릿 왕비가 이끈 랭커스터 파는 제2차 세인트올번스 전투에서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이끈 요크 파에 승리를 거두었고 구금되었던 헨리 6세도 풀려났다. 그렇지만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은 런던으로 가서 1461년 3월 4일 요크 공작 리처드의 아들을 에드워드 4세로 즉위시켰고 3월 29일에 벌어진 타우턴 전투에서 랭커스터 파의 군대를 패퇴시켰다. 스코틀랜드로 피신했던 헨리 6세는 1464년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와 왕위를 되찾으려고 했으나 실패하면서 1465년 7월 런던탑에 유폐되었다.
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요크 왕가가 잉글랜드의 왕권을 장악했다. 그렇지만 요크 왕가의 지배는 매우 불안정했다. 에드워드 4세는 랭커스터 파인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하고 우드빌 일족을 측근으로 끌어들이면서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과 갈등을 빚었다.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은 1469년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이자 자신의 사위인 클래런스 공작 조지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이듬해 프랑스로 탈출했다. 그리고 마거릿 왕비와 연합해서 랭커스터 파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와 1470년 10월에 에드워드 4세를 몰아내고 헨리 6세를 복위시켰다. 국외로 추방되었던 에드워드 4세는 이듬해 잉글랜드로 돌아와 1471년 4월 14일에 벌어진 바넷 전투에서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을 죽이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5월 4일에는 투크스베리 전투에서 승리해 에드워드 왕자를 죽이고 마거릿 왕비를 생포했다. 헨리 6세도 다시 런던탑에 유폐되었다가 얼마 뒤 살해되었다. 헨리 6세와 에드워드 왕자가 모두 죽으면서 에드워드 4세는 요크 왕가의 지배를 확립했다. 그러나 그가 1483년에 갑자기 죽으면서 상황은 다시 급변하였다. 그의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나이 어린 조카 에드워드 5세를 대신해 섭정을 맡았는데 그는 실권을 놓고 우드빌 일족과 대립하였다. 결국 글로스터 공작은 우드빌 일족을 제거하고 에드워드 5세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리처드 3세로 즉위했다.
결과와 영향
리처드 3세가 에드워드 5세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뒤에 그에 반대하는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다시 혼란이 발생했다. 당시 프랑스에 망명해 있던 랭커스터파는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를 왕위계승권자로 내세우고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인 마거릿 보퍼트가 초대 랭커스터 공작 존의 증손녀였으므로 그는 모계로 랭커스터 왕가의 왕위계승권을 지니고 있었다.
헨리 튜더는 1485년 8월 6일 군대를 이끌고 웨일스 남부의 펨프룩셔를 통해 영국으로 건너가 웨일스에서 리처드 3세에 반대하는 세력을 모았다. 그리고 8월 22일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죽이며 승리를 거두었다. 그 뒤 헨리 7세로 잉글랜드 국왕의 지위에 오른 헨리 튜더는 요크 왕가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에드워드 4세의 딸인 엘리자베스와 결혼했다. 1487년 리처드 3세의 왕위계승권자였던 링컨 백작 존이 요크 파의 세력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지만 6월 16일 스토우크필드 전투에서 진압되면서 헨리 7세의 지배가 확립되고 튜더 왕조의 시대가 열렸다.
참고 : By Tewkesbury1.jpg: Unknownderivative work: Jappalang (talk) - Tewkesbury1.jpg,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7022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