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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픠스 사건,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대표적인 인권유린

by moneyping 2025. 5. 21.

보불전쟁 후 19세기 후반 프랑스를 휩쓸었던 군국주의, 반유대주의, 강박적인 애국주의 때문에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프랑스 포병대위 드레퓌스의 간첩혐의를 놓고 프랑스 사회가 무죄를 주장하는 드레퓌스파와 유죄를 주장하는 반드레퓌스파로 양분되어 격렬하게 투쟁했던 정치적인 스캔들입니다. 이 글에서 드레퓌스 사건,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대표적인 인권유린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드레픠스 사건,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대표적인 인권유린
드레픠스 사건,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대표적인 인권유린

사건의 전개

보불전쟁(1870~71)에 처참하게 패배한 프랑스에서는 애국주의와 반독일 감정이 나날이 높아져갔고, 전 유럽은 민족주의로 인해 반유대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894년 9월, 프랑스 정보국 요원이 파리의 독일대사관에서 몰래 빼내온 문서를 통해 프랑스군 내부에 군사기밀을 독일로 유출시키는 간첩행위자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수사가 진행되던 중 참모본부에서 근무하는 육군 포병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필적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범인으로 지목되었다. 그는 유대인이고, 또한 그 당시 프랑스 사람들의 반독일 감정의 대상이었던 독일계라는 것이 그의 혐의를 짙어지게 만들었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1894년 12월, 드레퓌스는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후 종신형과 치욕적인 군적 박탈식을 선고받았다.그는 군적 박탈 직장에서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외쳤지만 "유태인을 죽여라"라는 군중들의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그는 강제로 불명예 전역한 뒤, 1895년 2월 21일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섬으로 유배당한다. 사실 재판 과정에서 서명과 자신의 글씨체가 다르다는 이의가 있었으나, 피고가 글씨체를 바꾸어 썼다는 말도 안 되는 근거를 내세워 묵살하였다. 실제 자신의 글씨체를 바꾸어 쓰기는 매우 힘든 일이다.

드레퓌스 사건의 전말

일부에서 드레퓌스에 대해서 무죄 주장이 있었으나, 그 당시 팽배했던 애국주의, 반유대주의, 반독일주의에 의해 가볍게 묵살되었다. 드레퓌스는 부족한 증거 자료에 기초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사실 드레퓌스는 무죄였다(발견된 정보 유출 문건에서 발견된 암호명 'D'에 따라 유태계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그 이름의 첫 글자가 암호와 일치한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지목됐다). 유대인에 대한 편견이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몰아간 것이다. 당시 고급 장교들은 그들의 실수를 덮으려고 사실을 은폐했으며 반유대적인 가톨릭교회와 보수주의 언론들도 드레퓌스 사건을 침소봉대하여 유대인들을 비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외치며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뒤 1896년 3월, 조르주 피카르 중령이 우연한 기회에 진범인 에스테라지 소령을 적발하게 되었다. 그는 참모본부 정보국에서 일하면서 또 다른 간첩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드레퓌스는 무죄이며, 진범은 에스테라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에 따라 그는 참모본부 상부에 이 사실을 알리며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1898년 1월 10일에 열린 재판에서 진범 에스테라지 소령은 무죄로 풀려난다.

그때 증거자료를 몰래 복사해서 실어 낸 어느 한 신문에 의해 드레퓌스 사건이 세상에 공개된다. 하지만 가장 곤란한 상대는 진범인 에스테라지 본인이었다. 그는 이런저런 거짓말을 늘어놓고 다녔고, 놀랍게도 참모본부는 그의 거짓말을 눈감아주었다. 그러나 사실이 알려지자, 군사 법정은 많은 비난을 받았고, 일부 사람들은 피카르와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사건의 영향

이 사건으로 우파 고급 장교들 등 재판 관리자들은 많은 비난을 받았고, 결국 이런 비난이 드레퓌스를 무죄로 이끌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반유대주의의 문제를 많이 느끼게 되었고, 결국 반유대주의는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하다가 결국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거의 사라졌다.

민중의 적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를 드레퓌스의 유죄를 믿는 가톨릭을 중심으로 한 보수층과 무죄를 믿는 개신교인과 지식인층 둘로 갈라놓았다. 가족 친지 간에도 드레퓌스의 유무죄를 놓고 싸우고 대립했다. 마침 파리에서 헨리크 입센의 연극 민중의 적이 공연하고 있었다. 이 연극은 그런데 연극의 내용이 마치 에밀 졸라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관객들의 난투극을 불렀다. 결국 연극 공연은 취소되고 말았다.

정교분리(라이시테)
드레퓌스 사건은 '라페르'라고도 불리는데 프랑스 제3공화국의 역사와 현대사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이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를 주축으로 한 보수파와 공화파 간 확연하게 나뉘어 이들을 중심으로 서로 다른 정치·사회적 세력들의 입장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마침내 프랑스에서는 1901년의 '결사에 관한 법의 규정과 이후 다음과 같은 새로운 일련의 법률들을 통해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되었다.

1902년 7월 법을 통해 국가적으로 허가를 받지 않은 약 3000개의 모든 가톨릭학교 폐쇄가 결정되었다.이것은 매우 심한 대중적 반발을 불러일으킨 조치였는데, 74명의 주교들이 항의서에 서명을 하여 명시적인 반대 및 항의 의사를 표시하였다. 동 법을 통하여 정부를 통한 주교의 급여 또한 정지되었다.
1903년 3월 법을 통하여 예수회를 포함한 모든 남성 수도단체의 해산이 결정되었다.
1903년 7월 법에서는 모든 여성 수도단체의 해산이 결정되었다.
1904년 7월의 법은 새로운 수도단체의 결성을 금지하였고 현재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마침내 1905년 정교분리법인 ‘국가와 종교 분리에 대한 법이 통과됐다.이 법은 당시 수상인 콩브의 이름을 따서 이른바 즉 콩브법이라 불리기도 한다.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위한 동 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정교분리원칙, 즉 정치와 종교의 완전한 분리를 의미하는 라이시테 원칙을 확립하였다. 이 법에 따라 프랑스 공화국에서는 어떠한 종교도 국교로 인정하지 않으며, 어떠한 종교에도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고, 종교 건물은 공공 재산으로 환원하고, 종교는 어떠한 정치적 권한도 행사할 수 없음을 규정했다. 이 법이 통과되자 당시의 교황인 비오 10세는 사목서한 프랑스 정교분리법에 관하여를 통해 공개적으로 강하게 종교적 비난을 하였고, 이후 수년 동안 프랑스와 가톨릭교회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드레퓌스 사건 100주년

드레퓌스의 유일한 죄는 유대인이라는 것뿐으로, 그는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의 희생양이었다. 자유 · 평등 · 박애라는 위대한 가치를 경험한 곳이라도 마찬가지였다. 개인이 국가 같은 거대한 권력과 싸우기 위해서는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의 희생이 뒤따라야 했다.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은 드레퓌스의 신념에 피카르와 에밀 졸라 같은 양심적인 인물들의 노력이 더해져 결국 ‘진실과 정의는 승리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낳았다. 그렇지만 진실과 정의는 언제나 승리할까? 인류의 역사를 살펴볼 때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으며 오늘날에도 알려지지 않았을 뿐, 이와 같은 일은 너무 많다. 그래서 우리는 거듭 드레퓌스 사건을 되새김해야 한다.

 

참고 : By 까렌다쉬 (인물) - This file comes from Gallica Digital Library and is available under the digital ID bpt6k2842896/f3.item,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438435